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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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중학교 교과서에서 보았던  "방망이 깎던 노인"을 최근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다.

마침 용역 제안서 작성을 준비하던 중이라 공감되는 부분이 참 많아 몇가지 포인트를 적어본다.


1. 시간의 부족함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제안 작업은 거의 항상 제출 기한이 촉박하다.
1주에서 2주 이내로 조사/기획부터  제안서, 발표자료, 기타 서류를 준비하고 이를 검수해야한다.

하지만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되지 않는다.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설득력 있는 해결전략, 우리의 역량을 아주 날카롭게 만들어야 한다.


2. 한번 더 보기의 마법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방망이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방망이다.

시간의 부족함에 대해 자각하고 스스로를 재촉할 수록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고, 눈은 흐려진다.

타임라인 관리는 중요하다.
다만 촉박함에 매몰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문제에서 멀어졌다 다시 들여다 보는 시간은 필요하다.


과업지시서와 제안요청서는 많이 읽을수록 문제와 과업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숙지했다고 생각해도 다시 보면 새로운 포인트를 알게된다.

제안서도 마찬가지다.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여러 관점에서 여기저기 돌려보지 않으면 안된다.

평가자, 수요자, 참여자, 그리고 그 결과로 삶이 바뀔 누군가.
다양한 관점의 검토 없이 완성도 있는 제안을 만들 수 없다.

아마 방망이 깎던 노인은 방망이를 사용하는 모습을 생생히 보고있지 않았을까.


3. 소라 붙이는 마음 + 경험과 역량

옛날부터 내려오는 죽기(竹器)는 혹 대쪽이 떨어지면 쪽을 대고 물수건으로 겉을 씻고 곧 뜨거운 인두로 다리면 다시 붙어서 좀체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새 죽기는 대쪽이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죽기에 대를 붙일 때, 질 좋은 부레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볕에 쪼여 말린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 붙인다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접착제를 써서 직접 붙인다. 금방 붙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소라 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제안하는 과정에서 제안을 통해 문제들이 잘 해결된 이상적인 모습을 그린다.

단순한 수행으로 충분한 프로젝트들도 있지만,
주민과 지역의 변화를 만들어 나가는 정성적인 프로젝트의 경우 소라붙이는 마음이 중요하다.

스스로에 대한 문제와 필요성에 대한 설득이 되지 않거나 문제 해결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당장의 현상은 해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짜 필요한 주민과 지역의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쉽지 않다.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도록 지속가능성을 생각하며 기획하고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기관 담당자들과 만날 때, 잘 운영될 것 이라고 기대한 프로젝트가 기대한 결과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대부분의 경우 '무엇을 하는지' 보다 '어떻게 하는지' 가 문제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소라붙이는 마음과 애정을 가지며,
어떻게 하면 목표 이상을 달성할 수 있을지 결정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경험과 역량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제안하는 과정은 재미있으면서도 마음이 어려울때가 많다.

공공제안의 특성상, 준비하는데 리소스가 많이 들고,

제안의 결과가 1 아니면 0이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제안을 통해 프로젝트가 성사되면 우리의 전략과 역량이 인정받는 기분이지만,

제안이 실패하면 길었던 준비의 시간이 허무하다.


제안서 깎는 노인(努人)으로 오늘 쓰는 제안서가 누군가의 손에 꼭 맞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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